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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용을 먼저 찾은 시진핑 주석

· 작성자愼鏞碩 · 등록일2014-05-14 · 조회534

1914년부터 4년간 계속된 제1차 세계대전은 인류역사상 가장 규모가 크고 여러 나라가 참전하여 가장 많은 인명피해를 기록한 전쟁이었다. 프랑스에서만도 140만 명의 군인들이 전선에서 목숨을 잃었고 부상자만도 300여만 명에 달했다. 프랑스의 20대 젊은이들의 절반이 전쟁터에서 산화하거나 부상을 당한 혹독한 전쟁이었던 것이다. 당시 인구 1천 명도 안되었던 남프랑스 프로방스 지방에 있는 뚜렛트의 일차대전 전몰용사비에 40여 명의 이름이 새겨져 있는 것을 보아도 얼마나 많은 젊은이들이 희생되었는가를 짐작할 수 있다.

1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경제 부흥을 위해 진력하던 프랑스는 노동력 부족이라는 난관에 봉착했다. 프랑스 정부는 당시 식민지 여러 나라로부터 노동력을 확보하는데 한계를 느끼고 중국인들을 유치하는 특별 계획을 세웠다. 중국의 젊은이들을 프랑스의 산업현장에 투입하기 위해서 프랑스가 창안해낸 제도는 근공검학(勤工儉學) 즉 근면하게 일하고 검약해서 공부한다는 명분을 내건 제도였지만 현실적으로 프랑스가 필요했던 것은 값싼 노동력이었다. 오늘날 경제 대국 중국의 기반을 마련한 덩샤오핑(鄧小平)은 16세의 어린 나이로 1919년 충칭(重慶)의 프랑스 유학 예비학교에 입학하여 이듬해 앙드레-르퐁호에 승선하여 10월 20일 마르세유 항에 입항했다. 훗날 그때의 심정을 덩은 『그 당시 우리는 너무나 나약한 중국을 더 튼튼하게 만들고 싶었으며 기존의 조국이 가난했기에 부유하게 만들고 싶었다. 우리는 공부를 해서 중국을 구할 방도를 찾기 위해 프랑스로 갔다』고 술회했다.

그러나 막상 덩이 프랑스에 도착한 해에는 극심한 경제 불황으로 수많은 실업자가 생겼다. 파리에만 실업자가 20만 명을 넘었다고 하니 중국 유학생들에게 당초의 약속을 지킬 수 없었다. 부잣집 출신인 덩은 섭씨 40도를 오르내리는 작업장에서 일주일에 50시간을 일하면서도 잘 견뎌냈다. 덩샤오핑은 르노자동차 회사에서도 임시직으로 일했지만 대부분의 세월을 리용의 고무공장과 국수 공장에서 비숙련 노동자로 최하급의 보수를 받으며 5년 동안을 근무했던 것이다. 기록에 의하면 덩은 노르망디의 중학교와 나타시옹·쉬르·센 대학에서 잠시 공부한 적은 있지만 졸업장을 받지 못했고 공장생활에 지쳐 프랑스어도 제대로 배우지 못했다. 그러나 덩은 근공검약 제도로 같은 해에 프랑스로 간 저우언라이(周恩來)를 만나 평생 동지가 되었으며 자본주의의 냉혹함과 비정함을 현장에서 처절하게 느끼면서 공산주의를 장차 중국이 나갈 대안으로 받아들였던 것이다. 역사의 아이러니라고 할까 자본주의 국가 프랑스가 중국의 젊은이들을 근공검약의 명분으로 불러서 공산주의 사상에 심취하게 만들어 결과적으로 중국의 공산화에 기여했던 것이다.

지난 4월 말 시진핑(習近平) 국가주석은 프랑스를 국빈자격으로 방문했다. 집권 후 처음으로 프랑스를 공식 방문한 중국 최고 지도자가 먼저 찾은 곳은 수도 파리가 아니라 리용이었다. 중국인들이 가장 존경하고 사랑하는 평생수상으로 불리는 저우 수상과 오늘날 풍요로운 중국을 설계한 덩 주석이 한 세기 전에 땀 흘리고 일하며 공부하던 리용에서 선배지도자들을 추모하면서 시진핑 주석은 고개를 깊게 숙였다. 과거의 역사를 결코 잊지 않으면서 미래의 귀감으로 삼겠다는 중국 지도자의 의연하고 결의에 찬 행보는 많은 프랑스인들을 감동시켰다.

<尙美會 이사>